난과 함께 하는 세월
장맛비가 계속되는 요즈음입니다. 황금같은 일요일에도 가는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전부 도서실에 가버리고 나니, 집안이 절간처럼 조용해졌습니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런 날 유리창 청소나 하자. 먼지도 안 날 것이고 아래층집에 물 튀어갈까 염려 안해도 되겠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청소도구를 집어들고 베란다 난간틀과 유리창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거실에 놓여진 컴퓨터 앞에서 무슨 작업을 하는지 넋을 빼고 열중하던 바깥 사람이 내가 청소하는 곳으로 오더니, 청소하는 나와 난을 번갈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들아, 너희들은 자라서 뭐하니? 꽃대는 올려서 뭐하니? 꽃은 피워서 뭐 하니?"
바깥 사람의 느닷없는 말에 저는 순간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여야할 지 할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베란다에 놓여진 난화분들은 저랑 성격이 정반대인 바깥 사람과 유일하게 함께 나누는 취미생활이거든요.
1991년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바깥 사람과 함께 난초를 키워 보기로 했습니다. 그때부터 휴일이 되면 대구 불로동 난꽃집에 가서 각종 난들을 구경하고 한국 토종란들을 몇 촉씩 사다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저희들이 어렸을 적에는 난 키우는 사람들은 아주 부유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취미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 우리도 난 키우는 것쯤은 취미로 가져도 될 나이이고, 또 마음의 여유도 가져보자고 합의했더랬습니다. 그때부터 불로동에 가서 이 꽃, 저 꽃들을 구경하다가 겨우 몇 촉씩만 사서 들고 오곤 했습니다.
비싼 것 - 아무리 희귀한 난이라지만 한촉에 수만원에서 수십만원, 심지어는 수백만원하는 것도 있다는 사실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은 엄두도 못내고 한촉에 사,오천원정도 하는 난을 몇 촉씩 구입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론 '이것도 실은 엄청난 값이다.'하면서 말입니다. 대엽 풍란, 소엽 풍란도 몇 촉씩 구입해서 애지중지 키웠습니다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버렸더군요. 꽃도 한 번 피워 보지못하고...
그러나 각종 난들을 키운 지 몇 년이 지나니,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알리는 듯, 화분마다 꽃대가 소복소복 올라왔습니다. 향기가 형언할 수 없을만치 황홀한 종류도 있는 반면, 아무리 향기를 맡으려 해도 향기가 나지 않는 난도 있더군요.
오년 전, 저희 아파트 15층에 사시는 분이 소엽풍란을 세 촉 분양해 주셨습니다. 조그마한 잎들은 언제 자라는지 얻어올 때 그냥 그대로, 표도 나지 않게 자라는 듯 마는 듯 그렇더군요. 제가 할 일은 마르지 않게 물만 주는 것 뿐이었습니다.
얻어 온지 이년째가 되던 해, 꽃대 하나가 올라 오더니 다섯 송이 꽃을 피웠습니다. 얼마나 깔끔하게 보이는 지 정말 그 맵시에 반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이듬해, 그 이듬해도 꽃대가 올라오지 않아서 마음 속으로 얼마나 섭섭하든지요.
그런데, 어쩜! 올해는 이렇게 꽃대가 무려 다섯 개나 올라왔습니다. 꽃은 열 여덟 송이가 피어 났어요. 순백의 햐얀 꽃잎들이 정말 어여쁘지요?
난을 키우며 깨달은 것이 있어요. 아무리 꽃이 보고 싶어도 때가 되어야 볼 수 있다는 것. 꽃대가 형성되었다해서 며칠 만에 그 꽃대가 쑤욱 쑤욱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기다릴 만큼 기다려야만 아니, 잊은 듯이 기다려야만 꽃대가 길어지고,꽃잎이 벌어진다는 것.
난을 보며 기다림의 미학을 배웁니다. 아, 또 있어요. 향기입니다. 일부러 맡으려고 하면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람결에 코끝으로 절로 스며드는 향기가 가장 멋있고 황홀하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한 식물의 세계입니다
글 쓴 날 2003-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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