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급 결혼 4주년 기념 제주여행 첫째 날
2022년 7월 12일 화요일 날씨 오후 구름
2007년 9월 1일 날이 제주현대미술관 김흥수 전시 개관일이었다고 한다. 유명한 김흥수 작품 세계로 빠져들어보자.
김흥수 화백 작품은 대다수가 여인이 주인공이다.
김흥수 화백은 여성의 누드와 기하학적 도형의 추상화를 대비시킨 조형주의를 개척한 인물로 '한국의 피카소'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김흥수 화백
출생 1919년 11월 17일
사망 2014년 6월 9일 (향년 94세)
김흥수 화백은 이중섭, 박수근 등과 함께 1910년대 한국 현대 화단에서 가장 지명도 높은 서양화 1세대 작가로 손꼽힌다.
프로필
1944 동경미술학교 유학과 졸업
1958 파리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 수학
1977년 I.M.F 미술관에서 구상과 비구상 요소를 하나로 융합한 조형주의(하모니즘) 회화를 발표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음양 조형주의라고도 표기하기도 했다. 조형주의는 여성의 누드나 한국적 이미지를 기하학적 도형으로 된 추상화를 대비시켜 그리는 등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화롭게 꾸며 예술성을 이끌어내는 독특한 화풍이다.
김흥수 화백 & 장수현 화백
두 화백은 대학시절 교수와 학생으로 만나 43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1992년 결혼
그러나 인명은 재천. 43세나 차이 나던 부인이 먼저 갈 줄 누군들 알았으리
그 당시 사회적으로 많은 얘기가 있었지만 장수현 화백은 개의치 않고 당당히 김 화백 옆에서 대외활동도 열심히 하고 또한 좋은 성과도 거두었다. 김흥수 화백의 하모니즘의 동지이자 아낌없는 지지자로 한결같은 존경과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준 장수현 화백은 20년의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젊은 나이에 암으로 떠나고, 2년 후인 2014년 6월에 김흥수 화백도 떠났다. 유족으로 3남 1녀가 있다.
조영남의 내가 만난 사람들
나는 김흥수 화백한테 단 한 번도 “오래 사십시오” 혹은 “몸 건강하십시오”라는 인사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런 말이 무색하게 그 어른은 늘 나보다 훨씬 더 튼튼하고 건강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어르신을 처음 뵌 건 1970년대 말 미국에 처음 가서 기타 하나를 둘러메고 필라델피아 공연을 갔을 때였다. 현지 교민들에 둘러싸인 김 화백을 멀찌감치에서 본 첫인상부터 나는 그분이 그곳의 터줏대감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미술에 남 다른 관심을 보였던 나는 생전 처음 한국의 유명한 ‘진짜 화가’를 만난다는 기대감이 엄청 컸다. 그러나 공연을 마친 후 리셉션에서 가까이 뵌 김흥수 화백은 나의 예상과 달리 빵모자에 파이프를 입에 문 우아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호방한 성격과 좌중을 압도하는 풍모는 해외에 망명 중인 무슨 독립투사 같았다.
당시 그곳 한인사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던 김 화백은 미국에 막 들어간 나를 위해 온갖 편의를 도맡아주셨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그 후 김화백은 나의 미술 전시회장을 여러 번 찾아주셨고, 나도 그분의 전시회와 방배동 스튜디오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곤 했다. 김흥수 화백 같은 대(大)화가가 신참 화가 지망생의 전시회장에 직접 발길을 한 것은 암암리에 실력을 인정해준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나는 보란 듯 어깨에 힘을 줄 수가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화가 김흥수의 미술 작품 자체보다는 그분의 높은 인격과 예술가 다움에 먼저 매료되었다. 우연하게도 같은 아파트에 살던 어느 화랑 주인으로부터 소위 ‘청기와 화재사건’의 전말을 소상하게 들은 후론 더욱 그렇게 됐다. 오래전 액자 제작으로 유명한 인사동의 표구점에 화재가 났는데, 아뿔싸! 마침 액자를 끼우기 위해 맡겨두었던 김 화백의 주옥같은 작품 수십 점이 몽땅 불타버렸던 것이다. 김 화백의 그림값은 엄청 비싸다. 하지만 그런 돈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그림들이 한 줌의 재로 변했던 것이다. 망연자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표구점 주인은 김 화백의 자택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이실직고를 했다. 그 순간 김 화백은 돌연 아파트가 떠나가라 “으으음!” 하는 동물울음 같은 괴성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할 수 없지. 다시 그려야지” 하면서 찻잔을 드시더란다. 물론 손해배상 같은 말은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또 한 번 미안하지만 나는 화가 김흥수의 미술보다는 그분의 획기적인 결혼에 흠뻑 매료되었다. 40세 연하의 여성을 아내로 맞을 수 있는 당당함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김 화백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김 화백은 그걸 지금까지도 몰랐느냐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이 사람아, 나이나 전통이나 이데아 같은 걸 따지면 예술이 아니지. 예술가가 매달려야 하는 건 오로지 자유 한 가지뿐이야.”
선생의 자유스러움은 옷차림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곤 했다. 근대 문화사에 그토록 특이한 서양식 복장의 인물이 존재했던가. 10여 년 전 내 결혼식 때 선생은 아래위 백색 양복에 백색 구두 그리고 형형색색의 컬러 머플러로 장식한 모자로 맵시를 휘날리며 피로연회장에 등장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날 밤 선생의 동반녀는 우리가 익히 아는 장수현 님이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파리 유학 중이었다. 의혹은 댄스파티가 시작되고서야 풀렸다. 김 화백은 프로급 사교 댄서였다. 선생은 밤새 춤을 추기 위해 일부러 품삯을 내고 일일 댄스 파트너를 고용했던 것이다. 선생은 물론 그날 밤 피로연의 대스타였다.
김 화백은 얼마 전 서울 평창동에 ‘김흥수미술관’을 건립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될 그 미술관 건립을 위해 사재를 털고 자신의 작품들을 담보로 빚까지 얻어댔다. 나는 어른의 원대한 계획과 의미까지 알기 때문에 “선생님 이젠 좀 쉬시죠” 혹은 “그 연세에 또 무슨 일을 하시겠다는 겁니까”라는 소리를 차마 묻지 못했다. 그 대신 평창동에서 제일 맛있다는 냉면과 만두만 얻어먹고 돌아왔다. (글 조영남)
유명한 화백들의 전시 작품을 보면서 미술 세계에 넋이 빠졌다. 설명 필요 없이 눈으로...
작품 감상을 마치고 아쉬움을 뒤로하며 다시 미술관 밖으로 나왔다.
저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며 걸을까?
뒤따라 가며 셔트를 눌러대어도 돌아보지 않았다.
금강산도 식후경 늦은 점심 먹으러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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