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식목일 전날이면 무슨 씨앗이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무를 심으면 우리나라는 푸른 강산 된단다."
하고 가르쳤던 그때가 많이 그립습니다. 법정 공휴일이었던 지난 날의 식목일을 추억하며 오래전에 쓴 수필 한 편 꺼집어내었습니다.
소중한 씨앗
아스파라거스
"선생님, 이거......"
"응? 뭔데?"
아이는 제 두 주먹을 합친 것보다 더 큰 주황색 호박 하나를 내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참, 벌써 호박을 딸 때가 되었구나. 몇 개나 땄니?"
"다섯 개 땄어요."
"그래, 올해 호박 농사 참 잘 지었구나. 이 호박이 너를 닮아 무척 예쁘다, 그지?"
주위에서 구경하던 아이들이 와그르 웃음을 터뜨린다.
대학 졸업 후 첫 발령을 받았다. 짐을 꾸리려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에서 지난 해 가을에 받아 넣어 둔 해바라기 씨앗 봉투를 발견했다.
이제 집을 떠나면 봄에 씨앗을 뿌릴 시기를 놓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씨앗 봉투도 함께 짐 속에 넣었다.
식목일 전날, 아이들에게 씨앗을 나누어 주었다.
"얘들아, 이것은 선생님이 고등학교 다닐 때 옆짝에게서 얻어 해마다 심었던 씨앗이야. 잘 키우면 여름에 보름달 만큼이나 큰 해바라기가 될거야. 잘 심고 가꾸어 가을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에게, 이웃에게 선물하도록 해."
그 해 가을, 학급 회장은 내가 심었을 때보다 더 큰 해바라기 하나를 통째로 잘라 왔다.
이것을 계기로 해마다 식목일 전날은 해바라기 씨앗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식목 행사에 대해 가르쳤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해바라기 씨앗도 함께 따라 다녔다.
그런데, 세 번째 학교를 옮겨 학급을 맡았을 때이다.
식목일 전 날, 씨앗을 나누어 주려고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연 순간 깜짝 놀랐다.
서생원이란 놈이 언제 장난을 쳤는지 쥐똥과 함께 껍질만 수북히 쌓인 채 둥근 해바라기 몸통만 남아 있었다.
맨 아래 서랍은 씨앗만 보관했으므로 그 동안 한번도 열어 보지 않은 내 불찰이었다.
(쥐란 놈들이 먹을 것을 찾아 다니다가 학교를 가장 만만히 봤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학교고 할 것 없이 수십 년 동안 쥐들에게 당한 피해는 곳 곳에 남아 있다. 예를 들면 교실 출입문마다 쥐가 쏧아 놓은 쥐 전용 출입구, 갉아서 구멍 낸 책상 서랍 등- 이런 것들이 나중 나에게 한 편의 동화를 탄생시켰다)
해바라기 씨앗을 나눠 주지 못한 나는 퇴근길에 들른 꽃집에서 조롱박 씨앗을 샀다. 식목일 다음날 아이들에게 몇 개씩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몇 주일이 지나도 싹이 텄다는 아이가 없었다. 불량 씨앗임에 틀림 없었다.
그 해 가을, 학교 옆 연구원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견학을 갔다.
조상들의 옛 생활 모습을 그대로 재현시켜 놓은 연구원의 한 켠 뜰에는 연자방아, 디딜방아,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아주머니, 기타 옛날 사람들의 생활 도구이 잘 진열되어 있었다.
아이들에게 옛날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설명하고 나오던 중 초가 지붕 위에 붉게 익은 화초 호박들이 눈에 띄었다.
그 곳에 근무하시는 분에게 나중에 씨앗을 좀 구하고 싶다고 했더니, 나중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느냐며 가장 잘 익고, 가장 큰 호박 하나를 선뜻 따 주셨다.
감사한 마음으로 호박을 안고 학교로 되돌아오며 이 씨앗을 지구 위에서 끝없이 이어지게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화초 호박은 겨울을 나고 이듬 해 봄까지도 제 색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잘 보관이 되었다.
식목일 전 날, 교탁 위에 호박을 올려 놓고 칼로 잘라 씨앗을 꺼내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말했다.
"얘들아, 이 씨앗은 보통 호박씨가 아닌 행복을 가져다 주는 화초 호박이란다. 너희들이 잘 심고 가꾸어 식물 관찰도 하고, 키우는 재미도 느껴 보렴. 식물도 사람의 정성과 사랑이 담겨야 잘 큰단다.
이들의 일기장에는 제 선생이 나누어 준 화초 호박에 대한 내용이 자주 등장했다.
아이들의 성격에 따라 화초 호박 씨앗의 운명이 결정 되었다.
호기심이 많고 반항적인 아이는
"호박씨는 까먹는거데이. 그라고 우리 집엔 심을 데도 없으니 먹어 치우자."
하며 받자마자 먹어버렸다.
숙제를 잘 해 오지 않는 아이는 씨앗을 심기 조차 잊어 버렸고, 게으른 아이는 싹은 틔웠으나 물주기를 제대로 하지 않아 시들어 죽게 만들었다. 성급한 아이는 싹이 튼 호박에 물을 너무 많이, 자주 주어 뿌리를 썩게 만들었다.
그러나 착실한 아이들은 새싹이 나고, 덩굴이 기어 오르고, 꽃이 피는 과정을 관찰기록장에 기록도 하며 정성들여 가꾸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을이 되자 내 책상 위에는 호박이 무려 일곱 개나 올려졌다.
탐을 내는 동료 교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이듬해 이월, 학교를 옮길 때, 짐 속에 두 덩이는 소중히 싸여 왔음은 당연했다.
새로 만난 담임에게 거는 기대가 단단한 아이들에게,
"얘들아, 선생님이 선물을 나누어 주겠다. 이것은 보통 호박 씨앗이 아닌 너희들에게'건강과 사랑'을 안겨 줄 씨앗이야. 자라는 모습, 꽃이 폈을 때의 느낌,익어가는 열매의 색깔들을 잘 관찰해 봐. 이것이 어떻게 해서 '건강과 사랑'의 호박인지는 너희들이 잘 심고 가꾸며 깨닫기 바란다."
하며 씨앗을 나누어 준 것이 엊그제 인 것 같은데 그 씨앗이 다시 열매로 맺혀 내 책상 위에 놓여 지다니, 새삼 세월의 빠름을 느끼게 해 준다.
교직에 첫발을 디뎌 놓은 후 육 년간이나 잘 이어져 왔던 해바라기 씨앗을 나눠주지 못했을 때의 그 섭섭했던 마음은, 이제 다시 이렇게 붉게 잘 익은 화초 호박을 해마다 대하며, 충분히 메꾸어 주고도 남는다. 또한 그 때의 그 서생원들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진다.
마당 없는 주택에 살기 때문에 직접 심어 가꿀 수 있는 화단의 공간이 비록 없더라도 아이들의 일기장을 통해, 창가로 드리워진 줄 따라 올라가는 호박덩굴순, 촛불을 켠 듯, 밤하늘의 총총 박힌 별을 보듯 샛노랗게 피어나는 호박꽃, 탐스럽게 잘 익어 대바구니에 담겨 집안의 가장 눈에 잘 뜨이는 곳에 놓여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을 열매......
이렇게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키운 것 이상으로 기쁘다.
내년 봄에 새로이 만나는 아이들에게 다시 나누어 줄, 교실 책상 위 바구니에 담긴 붉은 호박을 바라보며 나도 언젠가는 이 화초 호박들을 마음껏 심어 가꿀 수 있는 마당이 넓은 주택에서, 지금처럼 바쁘지 않고 여유롭게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가져 본다.
그리고 한 개의 씨앗에서 이렇듯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열매로 자라듯이, 내가 가르친 아이들도 이 사회 곳 곳에서 필요한 열매로 건강하게 자라나리라 기대한다. (1991년 작품)
작품 속의 1990학년도 하양초 1학년 새싹 제자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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