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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탐사 mind exploration/거꾸로 쓰는 육아 일기

외할머니와 외손자

by Asparagus 2010.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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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에서 실험 연구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일년만에 귀국한 돼지와 외할머니의 조우

2010년 10월 1일

 

친정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게 된 동기를 회상해 본다.

50Kg 몸무게로 쌍둥이를 가진 나는 임신 5개월째부터는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는 몸무게로 인해 직장 생활도, 가사 일도 너무 힘겨웠다. 드디어 65K까지 육박했던 임신 7개월째부터는 똑바로 누워도, 옆으로 누워도 너무나 불편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두꺼운 솜이불을 두 채 가져다 포갠 후, 꿇어 앉아서 그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잠을 잤다. 편한 잠 한 번 자보는게 당시의 소원이었다. 그렇게 자니 잠인들 제대로 잤을까? 입덧으로 인해 밥 하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드디어 임신 8개월이 되는 달, 아침을 먹고 나면 밥상을 들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당시의  주택 구조는 재래식 부엌이었고, 밥상을 안방에 갖다 놓고 먹던 시절이었다. 하루 밥 세끼도 제대로 못해 먹는 상황이 닥치자 너무 당황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그 시절. 맞벌이 하면서도 왜 당당할 수 없었을까? 부모들은 왜 남자들은 부엌에 들어가서 밥 하면 안된다는 가정교육을 했을까? 나는 물론이고 東도 그렇게 교육 받았으니 어쩌다 한번씩 도와주는 것은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 나 역시 그런 東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더 이상 내 몸에게 혹사를 시킬 수 없었다. 대구 친정으로 갔다. 믿을 곳은 오로지 친정엄마뿐이었다. 

 

당시 일년 전에 일흔 되신 아버지를 하늘로 보내시고 큰 오빠와 함께 살고 계시는 친정 어머니를 그냥 모시고  왔다. 그때 어머니 나이는 예순 다섯, 대구에서 내가 근무하는 시골로 기꺼이 오신 어머니는 그만 우리 집에 발목이 붙들리셨다. 

 

친정엄마가 쌍둥이를 키워 주시고 살림도 하실 동안 나는 친정에서 자랐을 적의 막내로 되돌아가버렸다. 내 낳은 자식을 엄마에게 맡겨놓고 직장 생활 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워 엄마에게 늘 투정만 했던 그 시절, 지금 생각하니 너무도 부끄럽고 몰염치했던 철 없던 딸이었다.

 

일년 만에 상봉한 외할머니와 외손주 

 

쌍둥이를 키우시면서

"얘들이 대학 가는 것 보고 눈 감아야지."

하셨던 친정 엄마. 벌써 아흔 두 살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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